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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2)
며칠 뒤.
중앙지검 앞, 공원 벤치.
오랜만에 말끔한 차림을 한 박현재 부장검사와 도경이 한 손에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들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박현재 부장검사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분명 저번 주와 같은 카페에서 산 커피인데 맛이 훨씬 좋구만. 깔끔하게 씻고 먹어서 그런가. 한 몇 배는 비싼 커피 같아.”
“죄송합니다. 더 비싼 걸 사 드렸어야 하는데…….”
“됐어. 이 검사가 나보다 훨씬 고생 많이 했잖아. 맘고생도 심했을 텐데. 이 검사가 수고했어.”
박현재 부장의 따뜻한 손이 도경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나 특검에서 빼준 거. 들어 보니까 자네가 구성한 팀원들이라던데.”
특검이 한창인 지금, 특검에 소속된 김지훈 검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도경이 박현재 부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회장 자금 추적하느라고 힘드셨잖습니까. 제가 부장님을 너무 다른 일에 부려 먹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이제는 나도 원래 내가 하던 일을 해야지. 이런 큰 사건들 말고, 작고 평범한 사건들의 피해자들을 생각하는 거.”
고개를 끄덕이던 박현재 부장이 도경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자넨 이제 어떡할 건가? 대검에서도 연락이 올 테고, 여러 군데서 많이 손을 내밀 것 같은데.”
“이젠 재벌가 손주가 아니라 그런지 생각보다 연락은 없습니다.”
“그래도 실력 있는 검사가 아닌가, 대기업 회장과 검찰총장을 잡아넣은 엄청난 실력 있는 법조인인데. 어디 생각해 놓은 데라도 있어?”
“…….”
“대검이나 조금 더 큰 곳에 가면 자네 그 능력이 훨씬 좋은 곳에 쓰일 것 같긴 한데.”
박현재 부장의 말에 도경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전 제자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위로 올라가는 건, 천천히 자연스럽게 갈 예정입니다.”
“그래,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럼 아직 내 부하인 건 맞지? 그럼 이젠 내가 자네를 부려 먹을 차례인가?”
장난스러운 박현재 부장의 말에 도경이 웃으며 답했다.
“예, 그동안 쌓이셨던 거 맘껏 푸셔도 됩니다. 사건들 몰아주셔도 전 감사히 받겠습니다.”
* * *
특검 사무실.
정신없이 바쁜 김지훈이 서류들을 펼치며 수사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때.
지이잉-
테이블에 놓인 김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도경아.”
-뭐 하냐?
“뭐 하긴, 인마. 일하고 있지. 누구 덕분에 아주 바쁘게.”
그때, 수사관이 김지훈을 향해 서류들을 들어 보였다.
“검사님, 이건 어떻게 할까요?”
“그건 제가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해서요. 다른 것들부터 먼저 처리해 주십쇼.”
휴대폰을 잠시 귀에서 뗐던 김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왜? 갑자기 무슨 전화야?”
-그냥, 이젠 나 가족도 없고, 너밖에 없잖아. 외로워서 전화했다.
“새끼, 장난은. 네가 가족이 왜 없냐? 너희 어머니 계시잖아. 그리고 나밖에 없단 애가 나를 이렇게 바쁜 특검으로 집어넣냐?”
-야, 너도 처음엔 좋아했잖아. 인제 와서 딴소리는…….
“아니, 이렇게 바쁠 줄 몰랐지. 됐어, 하여간 어머니한테나 잘해라. 뭐, 다른 별일은 없는 거지?”
-없어, 그냥 전화해 봤다. 알겠어, 끊어.
휴대폰을 내려놓은 김지훈이 잠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정신없이 바쁜 이곳과는 상반된 평화로운 외부.
김지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새끼, 청승은.”
* * *
그 시각, 도경의 사무실.
언제 대기업의 회장을 잡아넣고 검찰총장을 잡아넣었는지도 모르게, 도경은 예전과 같이 차분하게 사건들을 보고 있다.
“이건 굳이 타임슬립이 필요 없는 사건이고.”
보고 있던 사건 파일을 덮고 다른 파일을 다시 펼쳤다.
그러다 잠시, 도경이 파일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도경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사건들을 살피고 있는 지금이 믿기지 않았다.
예전 신입 검사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와 다른 점은 사건 파일로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정말 조용해.’
특검은 진행 중이었지만, 이 회장과의 밀접한 인물들에게 이미 손써 놓은 덕분이었는지 특검과 도경에게 들어오는 외압은 없었다.
‘내가 이 회장 손자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겠지.’
도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똑같은 일을 진행했던 박성준은 죽었고, 도경은 아무런 타격 없이 살아 앉아 있다.
도경은 권력자의 자식이다. 지금은 그 지위가 사라졌지만, 아직 돈은 남아 있다.
‘내 이름으로 남아 있는 땅과 건물들.’
한번 재벌은 돈이 있는 한 평생 재벌이다.
이태준과 이헌 회장의 재산은 그들이 꼼수를 쓸 때를 대비해 모두 찾아내 몰수했다.
이제 도경은 돈 많은 젊은 검사일 뿐이지만, 돈이라는 건 다시 권력을 세울 수도 있는 중요한 매개체.
도경은 남은 돈을 이용해 남은 카르텔과 비리 권력자들을 무너뜨릴 생각이다.
도경이 펼쳐진 파일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외국계 중견기업 계열사의 사장, 김지혁의 성폭행 사건이었다.
왠지 모를 익숙한 이름에 도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서에 적힌 변호인 이름을 휴대폰에 검색했다.
“대한로펌에서 변호를 맡았다.”
이상한 낌새에 도경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다시 회사명을 살펴봤다.
[ 그랜드 하이 ]
“잠깐만, 이 회사는…….”
* * *
그날 저녁.
외가에 머무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도경이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든 채 한 저택에 들어섰다.
“어머니, 순대볶음 좋아하신다길래…….”
“어머, 이런 거 한 번도 사 온 적 없으면서 웬일로 이런 걸 다 사 왔대.”
“친구한테 물어보고 맛집에서 사 왔어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도경이 비닐봉지를 어머니에게 넘겼다.
어머니는 도경에게 별말 없이 식탁으로 향했다.
도경도 그녀의 뒤를 따르며 집안을 둘러봤다.
어머니 김지연의 아버지는 외국계 중견기업의 회장이다.
동배그룹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은 아니었지만,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기업.
계열사의 몸집도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였다.
애초에 예술을 전공했던 도경의 어머니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남동생은 한 계열사의 사장을 맡고 있었다.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니.”
순대볶음을 접시에 옮겨 담던 어머니가 넌지시 서운함이 묻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젓가락을 놓던 도경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전 어머니가 오히려 걱정하실까 봐…….”
“내가 내 아들 말고 누굴 걱정하겠어.”
몸을 돌린 어머니가 천천히 도경에게 다가왔다.
“도경아, 넌 검사잖아. 검사가 검사 일하지 무슨 일을 하겠어. 넌 옳은 일을 한 거야. 그게 아무리 네 아버지랑 할아버지를 잡아넣는 일이래도.”
“어머니…….”
“그러니까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 너한텐 아직 내가 있잖니.”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도경이 왔냐?”
주방 앞에 멈춰 선 남자는 어머니의 남동생, 김지혁.
도경이 맡은 성폭행 사건의 피고인, ‘그랜드 하이’의 사장이었다.
김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경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외삼촌, 잘 지내셨어요?”
쫙 찢어진 눈에 도경을 만만하게 바라보는 눈동자.
도경의 외삼촌인 김지혁, 회장인 아버지의 핏줄이란 이유만으로 계열사를 물려받은 재벌가 망나니였다.
도경이 순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김지혁이 도경에게 다가오며 말을 뱉었다.
“나? 잘 지내진 못했지. 네 집안이 그렇게 풍비박산 났는데…… 우리 누나 불쌍해서 어떡하나. 집안 하나 믿고 그 집에 시집갔는데…….”
“김지혁, 적당히 하지.”
처음 들어 보는 어머니의 차가운 목소리에 도경의 시선이 틀어졌다.
그러나 김지혁은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도경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네가 큰일 했다, 도경아. 너희 집안 사람들 뒤로 저지른 죄도 많으면서 얼굴 뻣뻣이 들고 다니는 거 꼴사나웠는데…….”
“야, 김지혁!”
“아, 누나도 진짜. 누나 정신 차려! 이제 이 회장도 잡혔고, 누나 그 멍청한 남편도 없다고! 언제까지 그 집안 편만 들 건데? 이제 다 끝이야!”
“이게 진짜…….”
어머니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지자, 그녀를 노려보는 김지혁의 앞을 도경이 막아섰다.
“외삼촌, 일단은…….”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때, 몸을 튼 어머니가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지혁이 혀를 끌끌 찼다.
“아니, 내가 잡아 처넣었어? 왜 저렇게 나한테 예민해?”
“…….”
김지혁이 식탁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탁 놓으며 도경에게 시선을 틀었다.
“도경아, 네가 중앙지검 검사랬지?”
“네, 맞아요. 왜요?”
“아니, 그게 말이야…….”
혀로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리던 김지혁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내가 문제가 좀 생겨서 곧 중앙지검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네가 좀 도와줄 수 있겠냐?”
“문제요?”
“아, 그런 게 있어. 어떤 미친년이…… 아니, 그건 됐고. 내가 네 외삼촌이잖냐. 체면만 세울 수 있게 좀 도와줘, 알겠지?”
가만히 김지혁을 바라보던 도경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도와 드려야죠.”
* * *
며칠 뒤, 법원.
도경이 법정 방청석에 앉아 판사의 판결을 듣고 있다.
“……에 따라, 피고인 신무열에게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 * *
잠시 후.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법원에서 터덜터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앞을 도경이 막아서자, 천천히 고개를 올리던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 검사님!”
“고생하셨습니다, 신무열 씨.”
이태준의 살인을 방관했던 혐의로 잡혀갔던 신무열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무척이나 도경이 반가웠던 신무열은 도경을 껴안았다.
“아니, 신무열 씨 많이 바뀌셨네요. 포옹도 할 줄 아시고…….”
“아,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급하게 도경을 놓은 신무열이 고개를 숙였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죠?”
“검사님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정말 편하게 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무열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자, 도경이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런 도경을 바라보던 신무열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뉴스 봤습니다. 검사님, 정말 해내셨군요.”
“신무열 씨 덕분이에요.”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그나저나 수염부터 깎으셔야겠어요. 이제 다시 저랑 같이 다니셔야 할 텐데, 그렇게 다니면 검사들이 다 신무열 씨 잡아가려고 할 거 같아요.”
“아하하, 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신무열과 스타베팅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신 거면 지금 당장 제가 도와 드릴 게 있는 것 같은데…….”
“역시 눈치는 빠르시네요.”
걸음을 멈춘 도경이 신무열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신무열이 말을 뱉었다.
“뭐든 말만 하십쇼, 제가 온 힘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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