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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자주 온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제리는 이곳저곳을 데려갔다.
덕분에 고작 4일뿐인데도 한 달은 논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제리가 소개해 준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은 백여을은 호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제리는 유이진과 유초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내려갔기에 간만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었다.
나른한 기분을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진이니? 벌써 왔어?”
놀러 내려간 지 30분도 되지 않았기에 의아하며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사람은 없고 종이 백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백여을은 종이 백을 들었다.
안에는 옷과 쪽지가 담겨 있었다.
이거 입고 해변으로 나와 줘요.
“이현이구나….”
백여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종이 백 안에 들어 있는 옷은 가벼운 시폰 드레스였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백여을의 취향을 그대로 저격한 옷이었다.
백여을은 곧바로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화장까지 마쳤다. 옷은 그녀에게 딱 맞는 사이즈였다.
로비로 내려가자 호텔 직원이 다가왔다.
“손님, 한이현 에스퍼님께서 미리 말씀 주셨습니다. 차량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호텔 앞에는 자동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 익숙한 얼굴이 룸 미러로 보였다.
“김유라 요원?”
김유라는 룸 미러 너머로 백여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휴가는 잘 즐기고 계셨습니까?”
“어, 네. 재미있어요. 그런데 못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잠시 일이 생겨서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그러던 도중에 한이현 에스퍼에게 백여을 가이드를 픽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한이현을 만나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던 백여을은 김유라를 보자마자 안도하였다.
김유라는 운전을 시작하였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한이현이 말한 해변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일행이 지난 4일 동안 주구장창 갔던 제리의 개인 해변이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백여을 가이드.”
“고마워요.”
인사를 마치자마자 문이 열렸다.
한이현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백여을은 한이현이 내민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렸다.
백여을이 타고 왔던 차가 멀어지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드레스가 가볍게 살랑거렸다.
“…너무 예뻐요. 제 상상보다 더 잘 어울리고요.”
이 심플한 시폰 드레스가 천만 원이 넘는다는 걸 백여을이 알았다면 이렇게 편안할 얼굴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이현은 그걸 말해 줄 생각이 없었고, 이 드레스의 가격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백여을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며 되물었다.
“그래?”
“네, 무척 예뻐요.”
백여을은 한 걸음 물러나 한이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한이현은 백여을이 입은 시폰 드레스와 비슷한 계열의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이현이 너도 멋있어.”
천 너머로 반쯤 가려진 볼에 홍조가 올라왔다.
“다른 건 아니고… 해변을 걷고 싶어서 불렀어요.”
한이현의 말에 백여을은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응, 걷자.”
백여을과 한이현은 손을 맞잡은 채 바다를 걸었다. 파도와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아, 잠깐. 그 전에.”
백여을은 걸음을 멈추고 한이현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사라지자 한이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백여을은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이현아. 나밖에 없어.”
한이현은 눈을 느리게 떴다.
바로 앞에 있는 백여을의 눈과 마주쳤다. 백여을의 담갈색 눈동자에는 그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내 인생의 유일한 행운이에요.”
“이현아, 그동안 생각할 시간을 줘서 고마워.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너를 만나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 넌 내 인생의 전환점이야.”
백여을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한이현의 왼쪽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약지손가락에 반지를 껴 주었다.
“그러니까 내 마지막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주지 않을래?”
“…….”
“약혼부터 하자. 우리는 아직 젊고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하나씩 즐기자. 응?”
한이현은 잘게 떨리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손 약지손가락에 껴진 반지를 문질렀다. 작은 보석이 박힌 심플한 반지였다.
백여을은 한이현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한이현의 것보다 조금 작은 반지였다.
“나 눈 감고 있을 테니까 결정해. 수락이면 껴 주고, 아니면 그냥 휙 가 버려. 알겠지?”
백여을은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물고 눈을 감았다.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셋 센다. 하나, 둘….”
“하, 할 거예요. 근데 손이 너무 떨려서….”
눈을 뜨자 한이현이 백여을의 왼손을 붙잡은 채 반지를 껴 주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너무 떨리다 보니 계속 미끄러졌다.
“나 어디 안 가, 이현아. 천천히 해.”
“네, 네.”
한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이 지나서야 백여을의 약지손가락에 그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졌다.
그제야 백여을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와, 너도 저번에 프러포즈할 때 이렇게 떨렸어? 나 심장 아직도 떨리는 것….”
백여을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한이현의 입술이 맞닿았다.
한이현은 백여을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입술을 좀 더 깊게 맞물렸다. 백여을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도 잠시 눈을 감았다.
평소의 조급하던 입맞춤과는 달랐다.
서로의 입술이 가만히 맞붙어만 있는데도 가슴이 평소보다 더 간질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짠 맛이 났다.
눈을 뜨자 노을에 반사되어 한이현의 볼이 반짝였다.
“이현아… 너 울어?”
“좋아서요.”
백여을은 웃음을 터트리며 한이현의 볼을 문질렀다.
“결혼할 땐 아주 오열을 하겠는데?”
“나랑 결혼해 줄 거예요?”
“…….”
속마음을 들킨 백여을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뭐, 봐서?”
“지금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요. 아, 물론 결혼까지 당연히 원하고요.”
한이현은 다급히 덧붙였다.
“이거 꿈 아니죠? 너무 행복해서 꿈만 같아요….”
“꿈이면 좋겠어?”
“아니요!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자꾸 그래요….”
“미안. 귀여워서.”
백여을은 한이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저번에 말했었죠. 나랑 함께한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내가 행복했던 순간에는 항상 당신이 있었어요. 나한테 당신은 행복 그 자체예요.”
“나도야, 이현아.”
백여을과 한이현은 이마를 맞댄 채 서로를 향해 말했다.
“나 평생 행복하게 해 줘.”
“행복에 넘쳐흐르게 해 줄 거예요. 꼭.”
한이현은 백여을과 입을 맞닿은 상태에서 속삭였다.
“너무너무 좋아해요.”
***
두 달 뒤, 한국이 떠들썩해졌다. 커플링이나 데이트 장면이 목격되어 이전부터 시작된 소문이 사실화되었기 때문이다.
한이현과 백여을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그 시점은 이미 약혼식을 올린 지 한 달이 흐른 뒤였다.
한이현과 백여을이 가는 곳마다 기자와 사람들이 따라붙었으며 그 인파는 심각할 정도였다.
세 달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자 가이드 보호 센터 본부장인 도건은 공식적으로 주의하라는 경고를 날렸고 그 후에야 조금은 잠잠해졌다.
***
“언니!”
“초이야!”
백여을은 몇 달 사이에 훌쩍 큰 유초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백여을과 한이현의 약혼 소식으로 떠들썩했던 게 벌써 삼 년 전이었다. 그사이 유이진은 성인이 되어 활약을 하였고 유초이의 능력도 점차 현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예전에는 몇 달, 혹은 며칠 후의 미래를 봤다면 지금은 몇 초 후의 미래를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특히나 변이 게이트와의 전투에서 아주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유초이의 능력으로 목숨을 구한 자들을 줄 세워 본다면 그 숫자를 세는 데 하루가 걸릴 정도로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초이는 국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재가 되어 이번에 처음으로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
“세 달 전보다 더 큰 것 같은데? 곧 언니 키를 따라잡겠어!”
“저기, 여을아. 나 안 보여?”
“아구구, 우리 초이. 다 컸네.”
“언니, 보고 싶었어.”
유초이가 간 이번 출장에는 제리가 함께했다.
백여을은 제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유초이와 마저 재회를 즐겼다.
유이진이 오고 나서야 백여을은 유초이와 떨어졌다. 그제야 제리는 백여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나는, 여을아?”
“고맙지.”
아직 어린 유초이를 걱정하는 걸 알고 제리가 나서서 함께 출장을 나섰다는 걸 백여을이 모르지 않았다.
백여을의 말에 제리가 미소를 지었다.
“출장은 어땠어?”
“이미 본부장을 통해서 다 듣지 않았어?”
“그래도 직접 말해 줘.”
“초이가 아주 멋지게 활약했지.”
“다행이다.”
도건을 통해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또 듣고 싶었다.
“너는? 잘 지냈어?”
“나야 뭐, 평소랑 똑같지. 요즘 좀 피곤하고 체력이 떨어지더라.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거 나 먹이려고 하는 말이야?”
백여을보다 몇 살이 많은 제리였다.
백여을은 그런 의도가 아니지 않냐며 뭐라고 하고 난 후에야 제리는 표정을 풀었다.
“알지. 아, 어쩐지 초이가 너 몸 상태 걱정된다고 빨리 가자고 하더라.”
“나? 조금 피곤한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정말? 한 달 전부터 엄청 말하던데. 영상 통화를 하고 나서야 안심하더라고.”
“그래…?”
백여을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주치의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진료를 받아 보는 거 어때?”
“나 저녁에 이현이랑 약속 있는데.”
“뭔데? 아, 약혼 기념일?”
그제야 차려입은 백여을의 옷이 보였다.
“그럼 한이현과 같이 가면 되겠네.”
“그래도….”
“근데 이미 늦었어.”
“야, 너 설마.”
“응. 이미 말해 뒀거든.”
“야!”
백여을이 버럭 소리치자마자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시끄럽게 울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이현이 곧바로 다가왔다.
“병원 예약 잡았어요. 바로 가면 돼요.”
“아니, 그.”
백여을은 어버버하는 사이 이미 차에 올라타 있었다.
한이현의 과보호를 막긴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은 백여을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병원으로 갔다.
한 달마다 정기 검진을 받기 때문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한이현의 얼굴은 심각했다.
하윤서는 평상시보다 더 세밀하게 검진을 하였다.
몇 시간 흐르고 나서야 하윤서는 차트를 들고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음….”
하윤서는 차트와 한이현과 백여을을 계속 번갈아 보았다.
“이야, 신기하네. 그 능력이 이런 것도 알아맞히나?”
혼자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혼자만 알지 말고 빨리 말해 봐.”
한이현이 한쪽 다리를 계속 떨면서 물었다.
하윤서는 헛기침을 하곤 눈높이로 스타베팅 있던 차트를 내렸다.
백여을과 한이현은 두 손을 꽉 붙잡았다.
백여을이 부디 큰 병이 아니기를 빌었다. 제발….
“축하해요, 백여을 가이드. 임신이에요.”
“…네?”
“4주째라서 지난달에 몰랐었어요. 유초이 에스퍼 기가 막힌대요? 어떻게 알았지?”
“지금, 뭐라고….”
한이현과 백여을은 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하윤서는 깜빡했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쌍둥이예요. 정말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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